처음 OMA(Open Mobile Alliance)라고 하는 표준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이 2007년도 쯤이고 작년말에 활동을 종료했으니, 표준화 활동에 나름 발을 들여놓은 지 5년 정도 된 것 같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들이었지만, 이제 표준화 활동을 접는다는 생각을 하니 시원함 보다는 아쉬움이 더 남는다. 그러나, 5년간을 풀타임으로 전력투구할 상황은 안되었지만, 나름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남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많은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기에 이마저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름대로 도전이었고 내 삶의 마일스톤이 됐던 국제표준화 활동을 일단락하는 시점에서, 그동안 생각해봤던 몇가지를 기술하는 데에 이번 포스팅을 할애하고자 한다.
어디까지가 표준화 활동일까?
간혹 표준화 활동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이 3GPP나 OMA같은 사이트를 통해 표준문서를 읽고 분석하는 것 자체가 표준화 활동이라고 착각하시는 분들이 계신듯 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표준 규격에 대한 모니터링이나 서베이일 뿐 실제로 표준화 활동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아는 한 표준화 활동은 자사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표준으로 만들거나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기술을 빠르게 습득하기 위한 과정의 하나이다. 이러한 활동이 중요한 이유는 자사의 기술을 국제 기술 표준 시장에서 공공연하게 인정받음으로서 향후 해당 기술을 적용할 수 있는 잠재적 시장을 확대하고자 하는 측면이 있다. 지구상의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만 사용하는 기술이 아닌, 국제적으로 인정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해당 기술을 채택하고 있는 국가의 시장에 용이 하게 진입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이와 함께 병행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활동은 IPR 활동이다. 자사의 기술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기술로 만듦과 동시에 해당 기술에 대한 지적 권리를 획득해 놓는 것은 전쟁터에서 창과 방패로 무장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표준화 활동은 기술 규격에 대한 단순한 모니터링 차원 이상으로 해당 표준 단체에 참여해서 다른 국가 및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적극적으로 기고 활동을 벌이는 것을 말한다.
국제 표준화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꼭 영어를 잘 해야 한다?
국제 표준화 활동을 하면 아무래도 영어가 많이 늘겠다거나 잘 해야 한다거나 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다. 하지만 모두 틀린말이다. 지난 5년간 OMA에서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을 많이 봐 왔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표준화 활동을 하는 데에 어떤 심각한 장애가 있다고 생각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영어는 중요하다. 영어를 잘하면 자신의 의사를 보다 설득력있게 전달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공격으로 부터 자신의 기고를 보다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 하지만 영어 실력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기고가 채택될 것인가 말것인가에 대한 기준은 해당 기고의 내용에 의해서 좌우될 뿐 기고자의 영어실력과의 상관관계는 거의 없다고 본다. 다만, 표준 단체에 따라 그 분위기가 다르고 스케쥴 관리 방식이 상이하여 다른 곳에서도 같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어느 정도의 영어 실력은 필요하겠지만, 반드시 네이티브 스피커와 같은 유창한 영어실력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국제 표준화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영어 실력보다 중요한 것은 성실함과 꾸준함이다. 참고로, 국제 표준화 활동 자체가 영어를 잘 하도록 해 주지는 않지만, 영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지 않는 개인에게 영어 공부를 위한 동기부여는 될 수 있겠다.
표준 채택이 사실은 정치에 의해 좌우된다고 하던데?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표준화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기업을 대표하기 때문에 해당 기고자가 작성한 기고는 당연히 자기가 속한 기업의 이익을 대변한다. 표준 전문가가 작성한 기고에 대한 채택여부는 해당 기고의 내용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적합한 지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 외에 해당 기고자가 속한 회사의 네임밸류 또는 영향력과도 관계된다. 예를 들어, OMA의 경우 이동 통신사의 영향력이 매우 강한데, 이는 OMA의 구성원들이 모두 이동 통신사를 중심으로한 비즈니스 생태계에 엮여 있는 기업들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겨난 현상일 것이다. OMA 자체가 하나의 기고를 채택하는 데에 있어서 만장일치제를 권장하고는 있으나 해당 기고의 내용이 매우 민감한 사안인 경우엔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땐 결국 투표까지 가게 되는데, 이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업들간에 보이지 않는 '표 끌어오기' 전쟁이 시작된다. 투표권을 행사해야하는 가)안과 나)안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해당 기업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요소가 된다.
표준화 활동하면 좋은 점은?
국제 표준화 활동을 하다보면 외국을 비교적 자주 나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매우 부러워하게 되며 처음 표준화 활동을 시작할 때 나를 설레게 했던 이유 가운 데 하나이기도 하다. 문제는 막상 어느 나라 어느 도시의 어느 장소(일반적으로는 호텔)에 모여서 회의를 시작하면 여기가 어느 나라인지 종종 잊어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 8시 30분에 회의를 시작하여 오후 6시에 끝나니(OMA기준), 사실은 저녁 먹을 때 빼고는 하루 종일 밖을 나갈 일이 없는 것이다. 또한, 어느 나라를 가든 묶는 호텔은 대부분은 브랜드 호텔이다 보니 웬만하면 똑같이 생겼다. 외국을 많이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구경'할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은 짧으면 6개월, 오래가도 1년이면 모두 깨진다. 다만, 하루 일과를 끝내고 호텔 근처에서 맥주한잔 기울이는 소소한 재미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친한 사람을 만들어놓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놀이(?)'이다. 모든 표준화 회의가 끝난 이후, 비행기 시간까지 반나절에서 하루정도의 시간이 남을 수 있는데, 이 시간을 잘만 활용하면 그나마 '외국'이라는 존재감을 느낄 만한 활동의 기회는 얻을 수 있겠다.
이것보다 개인적으로 표준화 활동의 좋은 점이라고 생각하는 점은 세상의 넓음을 실감한다는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외국의 유수한 글로벌 업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로 제출한 기고를 가지고 니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갑론을박 할 수 있다는 것. 그들이 나의 의견에 귀를 귀울이고 자기의 의견을 공유하고, 때로는 함께 힘을 합쳐서 기고를 채택하고 표준을 만들어가는 그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한국이 아닌 그 밖에 너무나 넓은 세계가 있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내 생각엔 이러한 경험과 깨달음만으로도 개인에겐 큰 수확이라 생각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크게 뜰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또 하나 배운 것은 서로 다른 의견을 하나로 만들어가는 민주적 절차와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커뮤니케이션 스킬이다. 나의 의견이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열린 마인드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청취하는 능력 그리고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 첨예한 사안에 대한 일시적 후퇴 또는 갈등 회피 전략. 형형색색의 협상전략. 이 모든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
표준화 활동에 적합한 인재상
누군가가 표준화 활동에 가장 적합한 인재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안 보이는 데서도 성실히 일하는 사람'이라고 단정하여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표준화 회의가 개최되는 장소가 대부분 접근성을 고려하여 시내 중심가이다 보니 주변으로부터의 유혹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크고 작은 쇼핑몰부터 시작해서 관광지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경우가 많다. 한편, 표준화 회의를 주최하는 측에서는 어느 인원이 해당 회의에 참석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확인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개인의 자율성이 최대로 보장되는 것이다. 기업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다수의 인원을 파견하는 경우 어느 정도 나름의 규율이 작동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표준화 활동에 참여하는 인재가 책임감이 부족하거나 적응을 잘 못하는 경우 겉으로 돌 수 밖에 없고, 호텔 밖에는 이러한 사람들을 받아줄 곳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일주일 내내 한 두 번만 회의에 참석하고 나머지를 모두 관광하는 사람도 생기는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사람이라면 대부분의 사람에게 존재할 언어장벽을 넘어서야 하는 과제가 덤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남들 놀 때 같이 놀면 그 사람은 영원히 표준화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봤던 대부분의 한국인은 회의가 끝난 이후에도 나름대로 치열하게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거나 내일 발표할 자신의 기고를 다듬거나 또는 새로운 기고를 준비하면서 자기가 맡은 임무에 충실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쇼핑이나 음주 가무를 필요이상으로 즐기는 사람과 집중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표준화 활동에서 모랄 해저드가 발생할 가능성이 큰 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 표준화 전문가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능력은 커뮤니케이션 스킬이다. 단순히 영어를 잘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당사자를 먼저 이해하고 그들을 설득하는 능력을 말한다. 감정적으로 치달을 수 있는 의견대립의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은 표준화 활동 과정에서도 훈련될 수도 있겠지만, 기왕에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조기에 좀 더 탁월한 표준화 활동을 펼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국제 표준화 활동에 대한 짧은 경험을 OMA를 중심으로 두서 없이 적어보았다. IEEE나 W3C, 3GPP, ITU-T는 각각 나름의 방식대로 운영을 하고 있고 그 분위기도 제 각각 다르다고 한다. 하지만, 큰 맥락에서는 위에 언급된 내용들과 큰 차이는 없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국제 표준화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 외국 출장이 잦기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게 된다. 표준화 조직이 잘 갖추어져 있는 삼성이나 LG같은 곳을 제외하면, 대부분 그러할 것이다. 그러한 시기와 질투를 하는 사람들에게 표준화 전문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는 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표준화 조직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기업은 표준화 전문가의 활동을 강제할 수 있을 만한 체계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러한 강제성은 기업의 표준화 활동을 담당하고 있는 인력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수 밖에 없다. 스스로를 강제하고 스스로 실적 목표를 세우고 다녀와서는 보고를 통해 자신의 표준화 활동의 성과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표준 조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관련 담당자와 공유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표준화 활동이 당장의 매출을 올리는 실적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내부 고객을 설득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핵심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과 개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활동인 것 만은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는 아직 표준화 활동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아 몇몇 대기업을 빼놓고는 적극적으로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회사는 찾아보기 힘든게 현실이다. 앞으로, OMA든 W3C든 3GPP든 핵심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 중소기업이 능동적으로 IPR활동과 표준화 활동을 해 나갈 수 있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 역시, 앞으로 어느 단체에서든 표준화 활동을 다시 지속해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 Red M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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